공의 이름은 문벽(文璧)이요 자(字)는 윤지(潤之)이시니 추중 익대공신이신 휘 원보(元寶)의 후손이시다。공께서 나의 고조부 관봉공(冠峰公)에게 사숙(私淑)하였으므로 나도 또한 어려서부터 공의 문하(門下)에서 배우게 된 것이 三十년이나 된다。 공께서는 평생에 하신 일을 살펴보건대 우러러 보게 되는 마음이 극진케 된다。공께서는 거동과 모습이 큰 사람다웠고 천성이 어질고 두터우사 말수가 적고 기뻐하고 노여워 하심이 적었으며 언제나 근신하고 공손하셨으니 옛 성현이 바라보매 엄연하여 곧 온화케 된다고 이르심이 정녕 공의 기상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천성이 효도와 우애를 타고 나셨고 지극한 행실이 순수함을 갖추었으며 부모를 봉양함에 맛있는 음식과 부드러운 낯빛이셨으니 이는 공에게 있어서 적은 일들이매 모두들 수가 없다 하겠다。부친께서 병환이 계시매 약을 백방으로 시험하셨으나 효험이 없자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울면서 밤새도록 절하고 비시매 입으신 도포가 무릎이 모두 헤어졌었고 대변을 가져다 맛을 보아서 증세를 시험하였으며 마침내는 손가락을 베어서 그 피틀 흩려드려 희생을 바라셨었다。그 효성으로 하여 과연 四〜五일을 연명하시다가 돌아가시매 초종(初終) 이후로는 음식을 드시매 하루에 죽(粥) 한 그릇과 소금 한 슬에 지나지 않았다。 三년울 시묘 사시매 조석으로 곡하여 하루도 거르지 않으시니 그 슬피 울부짖을 때에 혹 지나던 사람이 있으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흩리고 갔다。겨우 三년상이 지나자 어머님이 깊은 병환이 나시매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면서 근심하고 당황해 하셨으나 점점 병세가 더하여 치료가 어렵게 되매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에 손가락을 찢어서 그 피를 흘려 드리매 이 때 병세가 거의 운명케 되었었는데 차도가 있었다。그러나 천명(天命)에는 비록 증자와 민자의 효도가 있다한들 어찌 하리오。 그 후 七〜八일이 지나 마침내 돌아가시니 또 三년을 여막(廬幕) 짓고 시묘(侍墓) 사시기를 또한 전과 갈이 하시었다。전후의 三년에 수척하여 뼈대만 남으셨다。그러나 六년간에 한번도 병이 나지 않아서 예절을 폐하지 않았으니 어찌하여 이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고을의 선비와 벗들이 모두 탄식하여 말하기를、『옛적의 (顔丁)과 소련(小連)이 아무리 초상을 잘 모셨다하나 오히려 이 사람보다 더함이 있을 것이냐』라고 하면서 슬퍼하 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의 큰 형은 이름이 문옥(文玉)이시니 일찍 작고하여 자손이 없으매 공이 몸소 호남 四백리를 가서 양자를 데리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말(馬)도 병이 나고 종(僕)도 지치었고 노자도 또한 떨어졌다。공께서는 이에 등으로 아이를 업고 간신히 돌아와서 백씨(伯氏)의 양자를 삼아주었다。그 후 양자도 또한 일찍 죽게 되었으나 다행히 한 아들을 두어서 이 때 낳은 지 수개월 이었는데 공께서 그 고아를 안아서 기르매 친손자와 다름이 없게 하였고 장성하매 토지와 종들을 반씩 나누어 주어서 살게 해 주었고 일찍이 어루만지시면서 말하기를 『이 손자가 나의 손자보다 더 근중하다』고 하셨다。 공의 천성이 부지런하여 농사를 열심히 지으매 중년(中年)이후로 집안 형편이 전보다 좀 나아지매 一년 소용 이외에 남게 되는 곡식은 논밭을 더 사는데 뜻을 두지 않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안팎의 친척이 그 은혜를 입지 않은 이가 없었고 어려움을 구제하매 근처에 혹 가난하여 시집 장가 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불러서 도와주고 혼수와 장사 모심에도 또한 이와같이 하셨으니 매년에 있어서 가난을 구제하고 곤궁한 이를 돌본 재물이 과연 얼마나 되었겠는지 모르겠도다。온 마을이 모두 그 지극한 효성을 감탄하고 또 그 후덕을 칭송하였으되 수(壽)는 능히 오래 하시지 못하고 五十二세에 돌아가시니 슬프고 애석하도다。내가 평소에 느끼고 사모함이 있던 터라 공경히 그 대략을 쓰는 바이다。 서기 一八六四年 甲子 月 司圃署直長 星州 玄永益 謹狀